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중공군 참전, UN군 후퇴 및 반격, 38선에 교착된 전선 == || [[파일:inchon_sangryuk_3.jpg|width=100%]] || 한편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중국은 내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공산당이 장악한 대륙을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했고, 아직 곳곳에서 저항 중인 국민당군 잔당도 정리해야 했고, 국민당 정부가 도망친 마지막 거점인 대만도 해방해야 했다. 그런데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당 정부가 몰락할 때까지도 동북아시아에 무관심했던 미국은 대한민국 방어를 명분으로 이 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강화했다. 그리하여 미 해군 [[제7함대]]가 타이완 해협에 포진하면서, 압도적인 미국의 해군력 때문에 1950년 10월에 예정되어 있던 중국의 대만 침공 작전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유엔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북한 지역을 폭격하던 미 공군이 종종 중국 영공을 침범하면서 만주 지역을 오폭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 내부에선 미국이 북한 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겨냥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증폭되었다. 김일성은 전황이 밀리기 시작한 9월부터 다급히 중국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중국 지도부 내에서는 6.25 전쟁 개입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으나 아직 본격적인 전쟁 준비가 덜 된 인민해방군의 상태와 북한 멸망을 방기하는 듯한 소련의 소극적인 태도에 처음에는 개입을 주저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고 10월 1일 제3보병사단이 처음으로 38선을 넘은 지 이틀이 지난 10월 3일 [[저우언라이]]는 [[인도]]를 경유해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조선인들 간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만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으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성 성명을 발표하였다. 물론 맥아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대로 북진을 개시했다. 이윽고 한반도 출병에 앞선 최종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중국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주전론을 내세웠고,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국경에서 멈출 지도 모르니 일단 개입은 자제하고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린뱌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비관론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펑더화이]]는 "조선의 지형을 고려해서 신중히 작전을 세운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주더가 여기 찬성함으로써 10월 8일 한반도 출병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 미국에 맞서 조선(북한)을 도와 가정과 나라를 지키자)"이란 명분 아래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만주 지역의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이 [[중국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10월 16일 인민지원군 선발대가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넜고 한반도로 진입했고,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10월 19일, 30만 명에 달하는 본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말 국군·유엔군이 [[청천강]]까지 건너 [[압록강]] 유역에 도달했을 때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되었다. [[인해전술]]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당시 참전한 중국군을 '닥치고 머릿수로 밀어붙인 군대' 수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 병력 규모가 상당한 점은 맞지만 단순히 물량만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다. 이때 6.25 전쟁에 참여한 중국군은 [[중일전쟁]]과 끝난지 얼마 안된 [[국공내전]]에 참여하여 일본 및 국민당과의 전쟁을 겪어본 [[베테랑]]들이었다. 흔히 국민당이 일본군과 주로 싸웠고 공산군은 도망다니기만 했다는 점 때문에 공산군이 정예군이 아니었으리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공산군은 '''그런 국민당을 이겨버리고 중국 대륙을 집어삼킨''' 엄청난 정예군이었다. 때문에 당시 중국군은 무식하게 총알받이를 앞세워 돌격만 하는게 아니라 수많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집단 운용하여, 신속하게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상대의 지휘 체계를 혼란시켜 부대 전체를 와해시키는 포위 전술을 구사하였다. 쉽게 말해, 당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술은 보병판 [[전격전]]이라고 보면 된다. 고대 [[로마]] 때부터 이어져 온 '한 지점에 대량의 병력을 집중시켜서 실질적인 전력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한다'는 포위섬멸 전술이었고, 중국군은 6.25 전쟁에서 대체로 공세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공격자의 장점인 '시간과 장소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라는 점을 매우 잘 활용했다. 물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병사들의 숙련도 및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야 했으나 앞서 말했듯이 중국군들은 대부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이 방식이 가능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도 장비의 질이 자신들보다 더 우위인 국민당 군대를 상대로 이미 이런 기습 교리를 충분히 숙달될때까지 익혀둔 상태였다. 또한 중국군 총 지휘관인 [[펑더화이]]가 미군과 한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것도 주요했다. 내용인즉, 미군의 경우 강력한 공군과 기갑 부대의 화력 그리고 차량에 의한 물자와 병력 수송에 크게 의존(도보 행군을 기피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행동 반경이 주로 도로와 평지로 제한되었다. 당시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이들은 도로와 평야보다는 산악을 통해 이동하였기 때문에 도로와 평야만 전진하던 미군은 산악을 통해 기동하는 중국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한반도 전역으로 뻗어있는 백두대간을 기동로로 사용하는 중공군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 지 몰랐고, 이 인민의 파도에 휩쓸리면 전투기와 전차를 써보지도 못한채 수류탄과 총검의 시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군은 신속하게 우회하여 UN군의 후미와 측면에 있는 보급로와 퇴로 등을 차단하며 공격해왔다. 낮에는 주로 숲속에 매복하고 가만히 미국의 공중정찰을 피하다가 야간에 기습하였는데,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로 야간 시야 확보가 잘 되지 않은데다 전장조차 수풀이 우거진 산지여서 공군과 포병을 통한 미군의 화력 우위를 전혀 살릴 수 없었다. 때문에 기갑 차량과 포병, 공군이 충분해도 중국군의 접근을 저지할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전선은 주로 미군을 중심으로 한 UN군 사단이 전방을 맡고, 후방에는 한국군이 배치되었는데, 당시 펑더화이가 평했듯 한국군은 중국군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으므로 UN군 주 패전 레파토리는 산길을 통해 이동한 중국군이 후방에 있는 한국군 사단부터 깨부순 뒤 UN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시키고 포위 섬멸하는 형태였다. 이런 일이 거듭된 것은, 그저 아군과 적군의 대치선만 생각하여 적의 이동 경로를 면밀히 살펴보지 못한 UN군 수뇌부의 실책이 컸다. 장비와 보급은 상대적으로 열약했지만 한반도와 붙어있는 지리적인 유리함을 이용해 기동력을 살린 포위 섬멸전을 구사한 결과 매번 공격할 때마다 우위를 점하였다. 중국군은 UN군의 후미에 침투하여 각각의 부대를 분리 · 고립시킨 뒤 병력을 집중시켜 각개격파 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UN군 지휘관들의 보고를 보면, 중국 본토의 중국인들이 몽땅 참전한 것 같았다고 하고 있다. 중국군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통계가 비밀스러운 점이 많아 한국 전쟁 당시 중국군의 병력 숫자는 공표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통계는 죄다 추정치로, 30만부터 300만설까지 다양하다. 아무래도 병력상 우위였던 것이 사실인지라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100만명 안팎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으며, Zhang, Shu Guang은 135만명이라고 주장했다. 간혹 중공군의 숫자가 유엔군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적었다는 의견이 나오는데 이는 중공군은 전방 부대의 약 30만명의 병력만 계산하고 유엔군은 후방에 있는 병력까지 합쳐 계산해서 나오는 오류이다. UN군 42만명 중 육군은 30만 남짓이고, 이 중 북한까지 진격한 전방 부대는 약 13만명 정도이다. 중국군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자 더글라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중국에 대한 핵폭격을 실행하고 [[장제스]]의 [[대만군|중화민국 국군]]을 중국 남부에 상륙시키는 등 거의 3차 대전을 고려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이 핵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을 빚어 나중에는 아예 해임당하게 된다. 처음엔 핵공격을 원하는 장병들이 많았고 트루먼도 핵폭격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를 기겁하게 했다. 당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핵무기만은 안 된다고 거의 애걸복걸했다 한다. 결국 트루먼은 핵폭격 반대론자가 된다. 중국군의 개입 과정에서 10월 공세가 틀어졌고, 11월 공세에서는 미군 1개 [[사단(군사)|사단]]이 거의 전멸하고 [[한국군]] 사단들 대부분이 편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삽질을 계속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어 [[평양]]까지 [[평양 철수|내줘야 했고]]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 시기 중국군의 보급 및 전투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빠른 후퇴였다는 평도 많다. 정작 중국군은 UN군이 평양-원산선 일대에서 방어를 유지할 거라 판단하고 신중하게 진군하다가 평양을 빠져나간 걸 알고서야 급속 진격에 돌입했다. 동부전선쪽도 만만치 않아서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당했다. 미군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이 시기에 '''최악의 혹한 속에서의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직접 [[총]]에 맞아죽는 이들보다 [[동장군]]에게 죽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물론 개개인의 방한장비가 미군보다 못했던 중공군 동사자는 더 많았다.] 전선은 [[평택시|평택]], [[오산시|오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UN군은 전선이 금강까지 밀리면 [[한반도]]를 포기하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200만 명을 [[제주도]]로 이주시키고 [[대만]]처럼 후일을 도모하는 옵션도 검토했다고 한다. 그런데 북위 37도선까지 내려왔던 중국은 UN군이 멘탈을 추스르고 전열을 가다듬자 한계에 봉착한다. 기본적으로 항공 전력이 없었던 중국군은 철저하게 인력 위주의 포위·섬멸·각개격파 작전으로 UN군을 압박하였는데, 전열이 듬성듬성 길게 퍼져있었던 참전 초기에는 큰 재미를 봤었지만 전선이 좁아지고 병력 배치가 조밀해지자 효과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중국군의 급작스런 참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엔군사령부|UN군]] 측의 패닉에 가까웠던 대응이 점차 원상태로 돌아온 것도 있었다. 게다가 [[커티스 르메이]]를 비롯한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 및 소개작전으로 북한 지역에서의 보급은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결국 중국 측의 보급은 길게 늘어지게 되었다. 항공전력이 없다시피했던 중국은 이를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으며 보급은 미 공군의 공습에 털리기 일수였다. 결국 보급 문제로 [[중국]]은 [[북위]] 37도선에서 [[지평리 전투]]를 시작으로 한 달간이나 발이 묶이고 만다. 다시 말해, 중국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었으며 이후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자 3월 14일, 다시 [[서울]]은 UN군 손에 재탈환되었다. 중국군은 집단으로 패주하여 전선은 처음 전쟁을 시작한 [[삼팔선]] 부근까지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은 [[중국 인민지원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유엔군사령부|UN군]]을 영구적으로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4월 22일 총 70만 명의 병사를 동원해 [[중공군 춘계공세|춘계 대공세(중공군 5차 공세, 4월 공세)]]를 감행한다. [[서울]]을 노리고 서부 전선에 주력 부대를 대거 배치한 중국군은 UN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4월 30일 [[서울]] 북쪽 8km 지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미 1군단을 섬멸하고 5월 1일 [[노동절]]에 [[서울]]에서 대규모 시가 행진을 벌이겠다던 중국군 수뇌부의 자신감과 달리 [[설마리 전투]]와 [[파평산 전투]]에서 공세탄력이 크게 꺾인 중국군은 끝내 서울을 재점령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중공군은 다시 한번 승기를 잡기 위해 5월 중순 2차 춘계 공세(중공군 6차 공세, 5월 공세)를 감행했지만 이 공세 역시 실패, 5월 말부터 시작된 UN군의 대반격을 얻어맞고 캔자스-와이오밍 선까지 후퇴하여 지금의 [[군사분계선|휴전선]] 비슷한 모양의 전선이 형성된다. 중국군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UN군을 상대로 벌였던 이 전투들로 인해 [[중국 인민지원군]]은 세계에 인구수 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미군]]은 [[태평양 전쟁]] 초반의 [[일본군]], 한국 전쟁 초반의 [[북한군]]에게 몇 차례 패전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대규모로 후퇴하진 않았고 결국엔 재정비하여 전선을 밀고 나가서 결국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에게 승기를 잡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에게 승기를 잡게 되어 역전에 성공했었지만, 인해전술이었던 [[중국군]]과의 이 전투에선 큰 피해를 입고 육로를 통해 대규모로 후퇴해야 했다. 다만, 후퇴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서울 방어에는 끝끝내 성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